4·3과 민간인 학살

■  초토화 학살에 대한 공권력의 증언 1

“그 때에 초토화작전이라는 말을 했는데, 싹 쑬어 버린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중산간마을에) 그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산에 올라 간 무장세력이 거기에서 도움을 받으니까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은 적이라는 작전 개념이었다” <제9연대 군수 참모, 김0식 증언,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초토화 학살에 대한 공권력의 증언 2

송요찬 연대장은 초토화작전을 폈다.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라, 또는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건 육지에서는 없었다. 초토화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또는 연대장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    <제9연대 선임하사 윤0준,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   공권력의 함정 집단 학살

1949년 1월3일 이른 아침, 허름한 갈중의(제주 노동복)를 입고 총을 든 한 무리가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하며 악수를 청했고, 어떤 이는 인공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집안에 들이닥쳐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 하지 않느냐”며 다그치면서 운동장으로 모이라 하고 70여명을 총살 하였다. 그들은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들로서 함정을 판 것이다.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공권력에 의한 새벽 마을 학살

1948년 11월 13일(음력 10월 13일) 새벽 5시께, 조천읍 교래리에 군인들이 중산간마을인 조천면 교래리를 포위한 가운데 집집마다 들이닥쳐 다짜고짜 불을 붙이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나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오던 주민들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날이 밝아 총성이 멎었을 때 100여호 모여 살던 교래리는 이미 잿더미로 변했다……..희생자 모두가 노약자들이었다. 시신들 대부분은 총에 맞은 채 불에 타 버렸고, 14살 난 소녀는 대검에 찔려 숨져 있었다.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  무장대에 의한 집단 학살

세화리 민보단은 제주에도서 가장 강했다. 늦은 밤 무장대가 길가로 들어서면서 부터 마을에 불을 질렀고 보이는대로 죽였다. 그리고 식량과 옷을 도둑질해 갔다. 당시 지서엔 응원대(충남부대 20명)도 있었고, 지서원(경찰 15명)들도 있었는데 갑자기 기습을 받은 것이라 경찰들은 정문 밖으로 나와 보질 않았다.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   특정인의 폭력성

탁성록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쁜 여자들만 여러번 바꿔가며 살았는데 나중에 제주를 떠나게 되자 동거하던 여인을 사라봉에서 죽이고 갔다. 그는 사형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  토벌대인 공권력의 고문

함덕리에서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함덕지서에서 나와 어머니, 동네 할머니, 그 아들 등 4명을 끌거가 어머니와 나는 산쪽의 이모부에게 음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모부의 행적을 대라고 하여 옷을 벗기고 알몸 상태에서 손가락, 젖꼭지에 전기 고문을 하고, 물고문 및 몽둥이로 전신을 구타당하였다  <출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